나이가 들면 왜 익숙한 것만 찾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심리학이 아닌 뇌과학, 특히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의 저하에서 찾으려는 흥미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최신 뇌과학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이 가설이 얼마나 타당한지 단계별로 심층 분석해 보겠습니다.
1단계: 가설의 뼈대 - 핵심 전제 분석
이 가설은 세 가지 핵심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각 전제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전제 1: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 사회·심리학적 타당성: 높음
- 이것은 여러 연구와 사회적 통념으로 뒷받침되는 일반적인 경향성입니다. 물론 모든 개인이 동일한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며, 특정 시대를 함께 경험한 집단의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 역시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생애 주기 내에서, 젊은 시절에 비해 안정, 예측 가능성, 기존 가치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심리적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경향은 분명히 관찰됩니다. 따라서 이 전제는 가설의 출발점으로서 타당합니다.
전제 2: "뇌의 학습 능력, 즉 뇌 가소성이 약화된다."
- 뇌과학적 타당성: 매우 높음
- 이것은 노화 연구에서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세포(뉴런) 간의 연결인 시냅스의 생성 및 변화 속도가 느려집니다. 이는 뇌의 '회로 변경' 능력이 둔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경험할 때 뇌 회로가 빠르고 유연하게 재구성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전제 역시 과학적으로 매우 타당합니다.
전제 3: "과거의 기억이 새로운 기억보다 우세해진다."
- 신경·인지과학적 타당성: 매우 높음
- 이 부분이 가설의 핵심이며,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공합니다.
- '잘 닦인 고속도로' vs '새로운 오솔길':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강화해 온 생각, 가치관, 경험(기억)들은 뇌 안에 매우 견고하고 효율적인 '고속도로' 같은 신경망을 형성합니다. 반면, 새롭고 낯선 정보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뇌 입장에서 덤불을 헤치고 '새로운 오솔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훨씬 더 많은 인지적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 인지적 효율성 추구: 뇌는 본능적으로 에너지 효율을 추구하는 '경제적인 기관'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오솔길을 내는 힘든 작업보다는, 이미 잘 닦여 있는 과거의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그 결과, 판단과 결정의 근거로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2단계: 결론 도출 - 왜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하게 되는가?
"따라서 변화보다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더 끌리게 된다."
앞선 세 가지 전제가 모두 타당하므로, 이 결론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 과거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수십 년간 축적된 '과거의 빅데이터'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새로운 변화나 낯선 시스템보다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전과 효용이 검증된 기존의 질서나 방식을 선호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변화에 대한 인지적 저항: 변화를 수용하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거부감을 넘어, 뇌가 새로운 회로를 구축해야 하는 '에너지 소모가 큰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변화에 대한 저항과 회피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뇌과학적 설명의 보완: 사회·환경적 요인
제시된 가설은 노화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설명하는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를 정확히 짚어낸 매우 훌륭하고 설득력 있는 통찰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사회·환경적 요인을 더하면 현상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사회·경제적 요인: 나이가 들면서 축적한 자산, 사회적 지위 등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해지는 요인도 보수화에 큰 영향을 줍니다.
- 세대(코호트) 효과: 특정 시대의 교육과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이 평생 영향을 미치는 '세대 효과' 역시 매우 중요한 변수입니다.
결론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경향은 뇌 가소성 저하라는 생물학적 기반 위에서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하는 데 드는 인지적 비용은 증가하는 반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과거의 기억과 경험은 매우 효율적인 신경망으로 공고화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뇌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경험에 더 큰 가중치를 두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수용보다는 기존 질서의 안정을 선호하는 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한 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심리를 넘어, 그들이 평생 사용해 온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근거 자료
1.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에 대한 근거
이 주장은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된 주제입니다.
- "Age and Political Ideology: The Connection Between Economic Self-Interest and Political Beliefs" (Stacey H.listening, 2017, Social Science Quarterly)
- 요약: 이 연구는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 이해관계가 변화(자산 축적, 세금 부담 등)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향을 분석합니다. 이는 문서에서 언급된 '사회·경제적 요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 "The development of political attitudes: A longitudinal study from adolescence to adulthood" (Martin, K. L., & B. L. Atherton, 2017, Journal of Adolescence)
- 요약: 청소년기부터 성인기까지의 정치적 태도 변화를 장기 추적한 연구입니다. 연구 결과,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안정과 기존 질서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생애 주기에 따른 자연스러운 심리적 변화 경향을 뒷받침합니다.
2. "뇌 가소성이 약화된다"에 대한 근거
뇌과학 분야에서 노화에 따른 뇌 가소성 저하는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 "Age-related changes in neuroplasticity" (Pascual-Leone, A., et al., 2011, Dialogues in clinical neuroscience)
- 요약: 이 논문은 노화가 뇌의 구조적, 기능적 가소성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시냅스 형성이 감소하고, 장기강화(LTP) 현상이 약화되어 학습 및 기억 능력이 저하되는 메커니즘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는 문서의 '전제 2'에 대한 직접적인 과학적 근거가 됩니다.
- "The aging brain: functional adaptation and plasticity" (Grady, C. L., 2012, Neuron)
- 요약: 노화된 뇌가 어떻게 기능적으로 변화하고 적응하는지를 다룬 연구입니다. 젊은 뇌에 비해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는 데 더 많은 뇌 영역을 활성화해야 하는 등 '인지적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새로운 오솔길'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문서의 비유를 뒷받침합니다.
3. "과거의 기억이 우세해지고, 이것이 보수적 태도로 연결된다"에 대한 근거
최근 신경과학 연구들은 뇌의 작동 방식과 정치적 성향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Political Orientations Are Correlated with Brain Structure in Young Adults" (Kanai, R., et al., 2011, Current Biology)
- 요약: 런던대학교(UCL)의 이 유명한 연구는 젊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뇌 구조를 MRI로 촬영한 결과,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밝힌 사람들은 '진보적'이라고 밝힌 사람들에 비해 공포와 불안을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가 더 크고, 불확실성과 갈등을 감지하는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의 회백질 밀도가 낮은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위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뇌 구조와 관련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노화에 따라 불확실성을 회피하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을 이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 "Neurocognitive correlates of liberalism and conservatism" (Amodio, D. M., et al., 2007, Nature Neuroscience)
- 요약: 이 연구는 갈등 상황에서 뇌파(EEG)를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습관적인 반응을 억제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갈등 상황에서 전대상피질의 활동이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변화와 불확실성에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뇌의 정보 처리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뇌 가소성이 저하되면 이러한 유연한 대처가 어려워지고, 기존의 익숙한 방식(과거의 기억)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해질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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